1919년 9월 2일 오후 5시, 신임 조선총독 사이토 마코토를 태운 특별열차가 남대문역에 도착했다. 현재의 서울역 자리에 있던 역이다. 사이토가 마차에 오르자 65세의 강우규가 폭탄을 던졌다.
폭탄은 마차에서 떨어진 곳에서 터졌고 사이토는 살아남았다. 현장에 있던 여러 사람이 다치고 일부는 뒤에 숨졌다. 공신력 있는 자료도 부상자 수를 34명과 37명 등으로 다르게 적고 있어, 하나의 숫자로 단정하기는 어렵다.
이 의거는 3·1운동 직후 일제가 통치 방식을 바꾸겠다고 선전하던 시기에 일어났다. 강우규는 이미 학교와 교회를 세우고 민족교육을 펼쳤던 인물이었으며, 대한국민노인동맹단 요하현 지부를 맡아 활동했다.
이 글에서는 남대문역 의거의 정확한 경과, 강우규가 거사에 나선 배경, 체포와 재판, 그리고 이후 의열투쟁에서 이 사건이 차지하는 의미를 살핀다.
목차
- 1. 1919년 9월 2일 남대문역에서 무슨 일이 있었나
- 2. 강우규는 왜 신임 조선총독을 겨냥했나
- 3. 교육운동가 강우규는 어떻게 의열투쟁에 나섰나
- 4. 의거 뒤 강우규는 어떻게 체포되고 순국했나
- 5. 강우규 의거는 무엇을 남겼나
- 자주 묻는 질문 (FAQ)
1. 1919년 9월 2일 남대문역에서 무슨 일이 있었나
국사편찬위원회 우리역사넷에 따르면 사이토 일행은 9월 2일 오후 5시 남대문역에 도착했다. 역 광장에는 총독 부임을 맞으려는 환영객과 군인·경찰이 모여 있었다.
사이토가 마차에 오른 순간 강우규가 던진 폭탄은 마차에서 약 12~13미터 떨어진 곳에서 폭발했다. 사이토는 목숨을 잃지 않았고, 현장에 있던 기자·경찰·철도 관계자 등 여러 사람이 다쳤다. 우리역사넷 인물 해설은 37명이 중경상을 입고 그중 2명이 뒤에 사망했다고 적는다.
다만 국사편찬위원회 『신편 한국사』는 부상자를 34명으로 기록한다. 이처럼 자료마다 집계가 달라 ‘정확히 몇 명이 다쳤다’고 단정하기보다, 사이토 제거에는 실패했고 다수의 사상자가 발생했다고 구분해 쓰는 것이 안전하다.

2. 강우규는 왜 신임 조선총독을 겨냥했나
3·1운동 뒤 일제는 헌병경찰 중심의 무단통치에서 이른바 ‘문화정치’로 통치 방식을 바꾼다고 내세웠다. 국사편찬위원회는 강우규 의거를 이러한 변화가 식민 지배를 장기화하려는 시도라는 판단에서 나온 경고로 설명한다.
강우규는 2대 조선총독 하세가와 요시미치가 물러나고 사이토가 부임한다는 소식을 접한 뒤 거사를 준비했다. 8월 초 서울에 들어왔고, 신문에 실린 사이토의 사진으로 얼굴을 익히며 남대문역 주변을 살폈다.
따라서 이 의거는 우발적인 행동이 아니었다. 신임 총독의 부임 시점과 이동 경로를 확인하고 준비한 계획적 의거였다. 다만 역사적 의미를 설명하는 일과 폭력의 장면을 자극적으로 재현하는 일은 구분할 필요가 있다.
3. 교육운동가 강우규는 어떻게 의열투쟁에 나섰나
강우규는 1855년 평안남도 덕천에서 태어났다. 한약방과 잡화점을 운영해 마련한 재산으로 함경남도 홍원에 영명학교와 교회를 세웠고, 이후 만주 요하현 신흥동에도 광동학교를 세워 민족교육을 펼쳤다.
1919년 3·1운동 소식을 들은 뒤에는 신흥동 주민들과 독립만세시위를 벌였다. 이어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조직된 대한국민노인동맹단에 가입해 요하현 지부 책임자가 됐다.
남대문역 의거 당시 그는 65세였다. ‘노인동맹단’이라는 이름과 그의 나이는 이 사건을 단순히 한 개인의 결단으로만 보지 않게 한다. 청년을 교육하던 노년의 독립운동가가 직접 행동에 나선 사건이었다.
4. 의거 뒤 강우규는 어떻게 체포되고 순국했나
강우규는 현장에서 곧바로 붙잡히지 않았다. 다시 거사할 계획을 세우며 서울 시내에 숨어 지내다가 의거 16일 뒤인 9월 17일 체포됐다.
재판에서 사형이 확정됐고, 1920년 11월 29일 서대문감옥에서 순국했다. 국가보훈부 공훈전자사료관은 그의 생몰년을 1855~1920년으로 기록하며, 정부가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했다고 밝힌다.
그가 남긴 기록에서 특히 두드러지는 말은 청년 교육에 대한 관심이다. 의거 이전에 학교를 세웠던 삶과 마지막까지 청년을 떠올린 기록은, 강우규의 독립운동이 교육과 행동이라는 두 축으로 이어졌음을 보여 준다.
5. 강우규 의거는 무엇을 남겼나
국사편찬위원회 우리역사넷은 남대문역 투탄사건을 3·1운동 이후 개인이 단독으로 감행한 최초의 의열투쟁으로 설명한다. 『신편 한국사』는 국내 폭탄 의거의 효시이자 1920년대 의열투쟁을 자극한 사건으로 평가한다.
사건의 결과만 보면 목표였던 사이토 제거에는 실패했다. 그러나 3·1운동 이후에도 식민 지배에 대한 저항이 끝나지 않았음을 드러냈고, 이후 의열투쟁의 흐름과 연결되는 역사적 장면이 됐다.
오늘의 서울역 광장에는 강우규 의사의 동상이 서 있다. 현재의 역 건물과 1919년의 남대문역은 같은 모습이 아니지만, 그 장소가 품은 사건은 한 세기가 지난 지금도 기억되고 있다.
마치며
1919년 9월 2일 오후 5시, 65세의 강우규는 남대문역에 도착한 신임 조선총독 사이토 마코토를 겨냥해 폭탄을 던졌다. 사이토 제거에는 실패했고 여러 사상자가 발생했지만, 이 사건은 3·1운동 이후 저항이 의열투쟁으로 이어지는 한 장면이 됐다. 학교를 세우던 교육운동가의 삶과 남대문역 의거를 함께 볼 때 강우규의 선택도 더 입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자주 묻는 질문 (FAQ)
Q1. 강우규 의거는 언제 어디에서 일어났나요?
1919년 9월 2일 오후 5시, 당시 남대문역 광장에서 일어났습니다. 남대문역은 현재 서울역 자리에 있던 역입니다.
Q2. 강우규 의거로 사이토 마코토가 사망했나요?
아닙니다. 폭탄은 사이토의 마차에서 떨어진 곳에서 폭발했고 사이토는 살아남았습니다. 현장에서는 다수의 사상자가 발생했습니다.
Q3. 의거 당시 강우규의 나이는 몇 살이었나요?
1855년생인 강우규는 의거 당시 만 64세였으며, 당시 자료와 역사 해설에서는 세는나이 기준으로 65세라고 소개합니다.
Q4. 강우규는 언제 체포됐나요?
의거 16일 뒤인 1919년 9월 17일 서울에서 체포됐습니다. 이후 사형이 확정돼 1920년 11월 29일 서대문감옥에서 순국했습니다.
Q5. 강우규 의거의 역사적 의미는 무엇인가요?
국사편찬위원회는 이 사건을 3·1운동 이후 개인이 단독으로 감행한 최초의 의열투쟁이자, 1920년대 의열투쟁의 흐름을 자극한 사건으로 설명합니다.
참고 자료
- 국사편찬위원회 우리역사넷, 「강우규」
- 국사편찬위원회 『신편 한국사』, 「의열투쟁의 전개」
- 국가보훈부 공훈전자사료관, 「강우규」 공적정보
- 국가보훈부, 「강우규 의사 의거 96주년 기념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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