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1년 9월 12일, 의열단원 김익상(金益相)이 전기수리공으로 변장해 조선총독부 구청사에 들어갔다. 국가보훈부 공훈전자사료관은 그가 2층에 폭탄 2개를 던졌고, 1개는 불발·1개는 폭발했다고 기록한다.
흔히 떠올리는 총독부 건물은 경복궁 앞의 석조 청사다. 그러나 그날의 청사는 그곳이 아니다. 1921년의 총독부는 남산 왜성대, 지금의 서울 예장동에 있었다. 경복궁 신청사는 1926년에야 준공됐다.
잠입일과 거사일도 한 날짜가 아니다. 공훈록은 9월 10일 베이징 출발, 11일 서울 도착, 12일 거사로 날짜를 나눈다. 같은 사전의 다른 항목이 13일을 적은 기록이 있어, 날짜를 섞으면 사건의 순서가 지워진다.
오늘은 김익상이 총독부 안으로 어떻게 들어갔는지, 폭탄이 무엇을 파괴하고 무엇을 놓쳤는지, 그리고 사이토 마코토 총독 암살이 왜 실패로 남아 있는지를 자료에 맞춰 살펴본다.
목차
- 1. 1921년 9월 12일에 무슨 일이 있었나
- 2. 왜성대 구청사와 경복궁 신청사는 어떻게 다른가
- 3. 김익상은 어떻게 총독부 안으로 들어갔나
- 4. 사이토 암살은 왜 실패로 기록되나
- 5. 탈출 뒤에 남은 기록
- 자주 묻는 질문 (FAQ)
1. 1921년 9월 12일에 무슨 일이 있었나
국가보훈부 공훈록은 김익상이 1921년 9월 12일 전기수리공으로 가장하고 총독부에 들어가 폭탄 2개를 투척했다고 적는다. 공적개요는 구청사 2층 비서과에 폭탄을 던졌다고 요약한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김익상」 항목은 방을 더 구체적으로 나눈다. 2층 비서과(총독실로 오인)와 회계과장실에 폭탄을 던졌고, 비서과 폭탄은 불발, 회계과장실 폭탄은 폭발했다는 것이다. 공훈록 본문은 방 이름까지 확정하지 않고 1발 불발·1발 폭발만 적는다. 두 기록을 한 문장으로 합치면, 확인된 폭발과 추정된 방이 같은 무게로 읽힌다.
따라서 이날은 ‘총독이 죽은 날’이 아니다. 식민 통치의 심장부에 폭탄이 터졌고, 목표로 한 총독은 살아남은 날이다.
2. 왜성대 구청사와 경복궁 신청사는 어떻게 다른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조선총독부 투탄 의거」는 거사 장소를 왜성대, 지금의 서울시 예장동에 있던 조선총독부 청사로 적는다. 국가기록원도 조선총독부가 처음에는 남산 왜성대의 1907년 통감부 청사를 썼다고 설명한다.
경복궁 앞의 석조 청사는 다른 건물이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구 조선총독부 건물」은 이 신청사가 1916년 착공, 1926년 준공됐다고 기록한다. 국가기록원은 사무 공간 부족을 이유로 경복궁 흥례문 구역을 철거한 터에 신청사를 지었다고 적는다. 1921년의 투탄은 이 건물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훗날 중앙청·국립중앙박물관으로 불린 경복궁 청사를 당일 현장처럼 쓰면, 남산의 구청사가 지워진다. 장소의 구분이 이 사건을 정확히 읽는 출발점이다.

3. 김익상은 어떻게 총독부 안으로 들어갔나
공훈록에 따르면 김익상은 경기도 고양 사람으로, 평양 숭실학교를 졸업한 뒤 기독교계 학교 교사와 광성연초공사 기계감독을 지냈다. 비행사가 되려다 뜻을 이루지 못한 뒤 베이징에서 의열단장 김원봉을 만나 입단했다.
같은 기록은 그가 조선총독 사이토 마코토를 처단하기로 계획하고 폭탄 2개와 권총 2자루를 받았다고 적는다. 1921년 9월 10일 베이징을 떠나 11일 서울에 도착했고, 다음날인 12일에 전기수리공으로 가장해 청사에 들어갔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 「김익상」 항목도 9월 12일 잠입·투탄을 명시한다.
국사편찬위원회 우리역사넷 「의열단」은 1919년 11월 10일 창립된 의열단이 파괴 대상에 조선총독부를 넣었다고 설명한다. 김익상의 잠입은 그 목록을 실행에 옮긴 장면 가운데 하나였다. 다만 이 글은 의열단 전체의 11건 거사를 하루 사건으로 압축하지 않는다.
4. 사이토 암살은 왜 실패로 기록되나
공훈록은 거사 직후 김익상이 피신했고, 총독부 투탄이 성과를 보지 못했다고 적는다. 우리역사넷 「의열단」도 이 의거를 4차 거사로 부르면서, 총독을 암살하지는 못했다고 설명한다. 백과사전은 폭발로 청사가 혼란에 빠졌고 건물 일부가 파괴됐다고 적는다.
사이토는 이미 1919년 9월 2일 남대문역에서도 강우규의 폭탄을 피한 인물이다. 2년 뒤 총독부 청사 안에서 다시 암살 시도가 있었지만, 목표 인물의 제거에는 이르지 못했다. 두 사건을 한 줄로 합치면, 날짜와 장소와 실행자가 모두 지워진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조선총독부 투탄 의거」 항목은 본문에서 “이튿날인 13일 아침”이라고 적는다. 같은 사전의 「김익상」 항목과 국가보훈부 공훈록, 2021년 보훈처의 100주년 기념은 모두 12일이다. 이 글은 13일을 채택하지 않는다. 불일치는 팩트체크에 남긴다.
5. 탈출 뒤에 남은 기록
공훈록과 백과사전은 김익상이 거사 직후 평양을 거쳐 베이징으로 탈출했다고 기록한다. 이듬해 1922년 3월 28일, 그는 상하이 황포탄에서 일본 육군대장 다나카 기이치를 겨냥한 의거에 가담했다. 공훈록은 오성륜과 함께 사격·투탄했으나 실패해 체포됐고, 나가사키로 압송됐다고 적는다.
재판과 출옥, 최후는 자료가 갈린다. 공훈록 본문과 백과사전은 1936년 8월 2일 출옥을 적는다. 같은 공훈록의 공적개요는 “21년만에 석방”이라고 요약하고, 일부 보도는 1942년 출옥을 적는다. 최후에 대해서도 공적개요는 일제 형사에게 암살됐다고 하고, 백과사전은 1941년·용산경찰서 연행 중 한강 투신 회고를 소개한다. 확인되지 않은 하나의 결말을 본문에 올리지 않는다.
정부는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다. 국가보훈처는 2021년 9월 12일 의거 100주년을 공식 기념했다. 날짜가 100년 뒤에도 12일로 고정된 이유는, 공훈 기록이 그날의 잠입과 투탄을 그 날짜에 묶어 두었기 때문이다.
마치며
1921년 9월 12일, 의열단 김익상은 전기수리공으로 변장해 남산 왜성대 조선총독부 구청사에 폭탄 2개를 던졌다. 1개는 불발했고 1개는 폭발했다. 사이토 총독 암살은 실패했고, 그는 평양을 거쳐 베이징으로 빠져나갔다. 거사일은 12일이며, 청사는 1926년 경복궁 신청사가 아니다. 출옥과 최후처럼 자료가 갈리는 대목은 단정하지 않는 편이, 이날을 정확히 남기는 방법이다.
자주 묻는 질문 (FAQ)
Q1. 김익상 조선총독부 투탄 의거는 언제인가요?
1921년 9월 12일입니다. 국가보훈부 공훈록은 9월 10일 베이징 출발, 11일 서울 도착, 12일 거사로 날짜를 구분합니다.
Q2. 사이토 마코토 총독은 이 의거로 사망했나요?
아닙니다. 폭탄 1개는 불발, 1개는 폭발했지만 총독 암살은 실패했습니다. 공훈록은 거사가 성과를 보지 못했다고 적습니다.
Q3. 거사 장소는 경복궁 앞 총독부 청사인가요?
아닙니다. 1921년의 청사는 남산 왜성대(현 서울 예장동) 구청사입니다. 경복궁 신청사는 1926년에 준공됐습니다.
Q4. 어떤 자료는 9월 13일이라고 하지 않나요?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조선총독부 투탄 의거」 항목 본문에 13일이 나옵니다. 같은 사전의 「김익상」 항목과 국가보훈부 공훈록은 12일입니다. 이 글은 12일을 따릅니다.
Q5. 김익상은 의거 뒤 어떻게 됐나요?
평양을 거쳐 베이징으로 탈출한 뒤, 1922년 3월 28일 상하이 황포탄 의거에 가담하다 체포됐습니다. 정부는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습니다. 출옥 연도와 최후는 자료가 갈려 한 날짜로 단정하지 않습니다.
참고 자료
- 국가보훈부 공훈전자사료관, 「김익상」 공훈록
-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김익상」
-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조선총독부 투탄 의거」
-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구 조선총독부 건물」
- 국사편찬위원회 우리역사넷, 「의열단」
- 국가기록원, 「조선총독부 청사 철거」
- 국가보훈처, 「김익상 조선총독부 폭탄 투척 의거 100주년」(2021.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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