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9년 9월 11일, 대한민국 임시의정원이 「대한민국임시헌법」을 공포했다. 국사편찬위원회 우리역사넷은 이 문서를 3·1운동 이후 여러 임시정부를 하나로 묶는 과정에서 나온 헌법으로 기록한다.
흔히 기억되는 날은 그해 4월 11일이다. 상하이에서 「대한민국임시헌장」이 선포되고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된 날이다. 그러나 4월의 헌장은 10개조였고, 9월의 헌법은 전문과 8장 58조 체제였다. 같은 해의 문서이지만, 이름과 규모가 다르다.
헌법안은 9월 6일 임시의정원에서 만장일치로 통과됐고, 9월 11일 공포됐다. 통과일과 공포일을 한 날짜로 합치면 사건의 순서가 지워진다.
오늘은 흩어져 있던 임시정부가 어떤 형식으로 통합됐는지, 국무총리제에서 대통령제로의 전환이 무엇을 바꿨는지, 그리고 이 헌법이 남긴 한계는 어디까지인지를 자료에 맞춰 살펴본다.
목차
- 1. 1919년 9월 11일에 무엇이 공포됐나
- 2. 4월의 임시헌장과 9월의 임시헌법은 어떻게 다른가
- 3. 세 임시정부는 어떻게 하나로 묶였나
- 4. 대통령제와 삼권 분립은 무엇을 바꿨나
- 5. 헌법 공포 뒤에 남은 질문
- 자주 묻는 질문 (FAQ)
1. 1919년 9월 11일에 무엇이 공포됐나
우리역사넷 「사료로 본 한국사」는 1919년 9월 11일 대한민국 임시의정원이 「대한민국임시헌법」을 공포했다고 설명한다. 국가법령정보센터에도 이 법령의 시행일이 1919년 9월 11일로 등재돼 있다.
같은 자료는 헌법안이 9월 6일 임시의정원에서 만장일치로 통과된 뒤 9월 11일 공포됐다고 날짜를 나눈다. 국립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관도 제6회 임시의정원의 심의 경과를 같은 순서로 정리한다. 제6회 회의는 1919년 8월 18일 열렸고, 헌법개정안은 8월 28일 제출된 뒤 9월 4일부터 6일까지 제3독회를 거쳐 통과됐다.
따라서 이날은 ‘임시정부가 처음 선포된 날’이 아니다. 이미 서 있던 정부들을 하나의 헌법 체제로 묶고, 그 결과를 공포한 날이다.

2. 4월의 임시헌장과 9월의 임시헌법은 어떻게 다른가
1919년 4월 11일 상하이에서 선포된 「대한민국임시헌장」은 10개조였다. 우리역사넷은 제1조에서 대한민국을 민주공화제로 두고, 제2조에서 임시정부가 임시의정원의 결의에 따라 통치한다고 규정했다고 적는다. 평등, 기본권, 교육·납세·병역의 의무, 구황실 우대, 생명형·신체형·공창제 폐지 등이 짧은 조문에 담겼다.
9월 11일의 「대한민국임시헌법」은 이 헌장을 기본으로 삼았다고 전문에서 밝힌다. 그러나 체제는 크게 달라졌다. 우리역사넷과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이 헌법을 전문과 제1장부터 제8장까지, 강령·인민의 권리 의무·임시대통령·임시의정원·국무원·법원·재정·보칙의 58개 조로 정리한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이를 상하이 임시정부가 대한국민의회를 흡수하고 한성정부와 통합한 통합헌법, 곧 제1차 개헌으로 부른다. 우리역사넷 해설은 10개조의 헌장을 개정했다기보다 사실상 헌법을 제정한 것에 가깝다고 본다. 두 표현은 같은 사건을 가리키되, 4월 문서와 9월 문서를 하나로 합치지는 않는다.
3. 세 임시정부는 어떻게 하나로 묶였나
3·1운동 이후 임시정부는 한곳이 아니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1919년 3월 17일 연해주 대한국민의회, 4월 11일 상하이 대한민국 임시정부, 4월 23일 한성정부를 각각 적는다. 한성정부의 선포 장소는 서울 서린동 봉춘관의 국민대회였다.
우리역사넷은 통합의 최종 형태가 한성정부의 법통을 계승하고, 연해주와 상하이의 임시정부를 개조하는 합의였다고 설명한다. 물리적으로 한 청사에 모든 기구가 모였다기보다, 한성정부를 매개로 조직을 다시 짜는 방식이었다.
국립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관은 1919년 5월 이후 상하이와 연해주가 통합을 논의했고, 그해 8월 한성정부를 계승하는 방식으로 합의했다고 정리한다. 통합을 대비한 헌법개정안과 정부개조안은 국무총리대리 안창호의 지휘 아래 내무차장 신익희가 중심이 되어 마련됐다. ‘통합 출범’을 단일한 이전(移轉)처럼 단정하면, 이 합의의 형식이 가려진다.
4. 대통령제와 삼권 분립은 무엇을 바꿨나
4월 헌장의 통치 규정은 임시의정원의 결의에 의한 통치였다. 9월 헌법은 국가수반을 국무총리에서 임시 대통령으로 바꿨다. 우리역사넷이 옮긴 제11조는 임시 대통령이 국가를 대표하고 정무를 총람하며 법률을 공포한다고 적는다.
제5조는 입법권은 의정원이, 행정권은 국무원이, 사법권은 법원이 행사한다고 명시했다. 삼권 분립을 조문에 올린 대목이다. 동시에 제6조는 대한민국의 주권 행사를 헌법 범위 안에서 임시 대통령에게 위임한다고 규정했다. 분립과 위임이 한 문서 안에 함께 들어 있다.
대통령은 임시의정원에서 기명단기식 투표로 선출하되 총수의 3분의 2 이상을 얻도록 했다. 육해군 통솔, 계엄 선고, 의정원 소집, 긴급명령 등도 직권에 포함됐다. 국무원과 주외 대사·공사의 임명, 개전·강화와 조약 체결에는 임시의정원의 동의가 필요했다. 권한은 커졌지만, 동의와 탄핵 규정도 함께 두었다.
5. 헌법 공포 뒤에 남은 질문
우리역사넷은 이 헌법이 대통령제와 삼권 분립을 마련하고 근대 헌법의 체제를 갖췄다고 평가한다. 다만 같은 해설은 타국에서 재판권을 행사하는 법원 규정이 국제법에 어긋날 수 있어 이념적 의미에 가깝다고 적는다. 기념관 글도 남의 나라에서 법원을 운영하는 일이 현실적이지 않았다고 설명한다.
통합 헌법이 곧바로 안정된 정부를 보장한 것도 아니다. 기념관은 강력한 대통령제 헌법 제정 뒤 임시정부가 분열과 내부 갈등에 휩싸였고, 임시정부를 해체하고 새 정부를 만들자는 국민대표회 운동에 부딪혔다고 기록한다. 이 글은 그 갈등의 책임을 특정 인물의 성격으로 단정하지 않는다. 확인되는 것은 헌법 체제와 실제 운영 사이에 긴장이 남았다는 사실이다.
4월 11일이 민주공화제의 출발을 선언한 날이라면, 9월 11일은 흩어진 정부를 하나의 헌법 문서로 묶으려 한 날이다. 두 날을 함께 두어야 임시정부의 첫해가 정확히 읽힌다.
마치며
1919년 9월 11일 「대한민국임시헌법」이 공포됐다. 헌법안은 9월 6일 만장일치로 통과됐고, 4월 11일의 10개조 임시헌장과는 별개의 8장 58조 체제였다. 한성정부의 법통을 계승하고 상하이·연해주 조직을 개조하는 통합, 국무총리제에서 대통령제로의 전환, 삼권 분립의 명시는 이 문서의 핵심이다. 통과와 공포, 헌장과 헌법을 구분해 기억하는 일이 9월 11일을 정확히 읽는 방법이다.
자주 묻는 질문 (FAQ)
Q1. 대한민국임시헌법은 언제 공포됐나요?
1919년 9월 11일입니다. 국사편찬위원회 우리역사넷은 이날 대한민국 임시의정원이 「대한민국임시헌법」을 공포했다고 기록합니다.
Q2. 헌법안 통과일과 공포일은 같은가요?
아닙니다. 헌법안은 1919년 9월 6일 임시의정원에서 만장일치로 통과됐고, 공포는 9월 11일입니다.
Q3. 4월 11일 임시헌장과 9월 11일 임시헌법은 같은 문서인가요?
아닙니다. 4월 11일의 「대한민국임시헌장」은 10개조이고, 9월 11일의 「대한민국임시헌법」은 전문과 8장 58조 체제입니다.
Q4. 임시정부 통합은 어떤 방식이었나요?
우리역사넷에 따르면 한성정부의 법통을 계승하고, 상하이와 연해주의 임시정부를 개조하는 형식이었습니다. 한성정부의 선포일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이 1919년 4월 23일로 적습니다.
Q5. 임시헌법은 대통령제를 어떻게 규정했나요?
국가수반을 국무총리에서 임시 대통령으로 바꾸고, 제5조에서 삼권 분립을 명시했습니다. 동시에 제6조는 주권 행사를 헌법 범위 안에서 임시 대통령에게 위임한다고 규정했습니다.
참고 자료
- 국사편찬위원회 우리역사넷, 「대한민국 임시 헌법」(1919.9.11.)
- 국사편찬위원회 우리역사넷, 「대한민국 임시 헌장」
-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대한민국임시정부헌법」
-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성정부」
- 국립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관, 「임시정부의 통합을 지향한 ‘대한민국 임시헌법’」
- 국가법령정보센터, 「대한민국임시헌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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