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45년 8월 17일, 김대건은 어떻게 첫 한국인 사제가 됐나

1845년 8월 17일, 김대건은 어떻게 첫 한국인 사제가 됐나

1845년 8월 17일, 김대건은 중국 상하이의 김가항 성당에서 페레올 주교에게 사제품을 받았다. 국사편찬위원회 우리역사넷과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이 함께 확인하는 기록이다. 그는 이로써 한국인 최초의 가톨릭 사제가 됐다.

이 사실을 조선 땅에서의 서품으로 기억하기는 쉽지만, 장소는 당시 중국 상하이였다. 김대건은 조선을 떠나 교육을 받고, 조선에 들어와 선교사 입국을 준비한 뒤 다시 상하이로 건너가 서품을 받았다. ‘최초’라는 한 단어 앞에는 긴 이동과 준비가 있었다.

이 글은 김대건을 신앙의 상징으로만 소개하지 않는다. 19세기 조선의 국경과 바다를 오가며 공부하고 항로를 준비했던 한 청년이, 8월 17일 어떤 자리에 이르렀는지를 사료가 확인하는 범위에서 살핀다.

또한 ‘첫 한국인 사제’는 한국인 로마 가톨릭 사제라는 범위의 표현이다. 이후의 평가와는 구분해, 먼저 날짜·장소·여정이라는 확인 가능한 기록부터 따라가 보자.


목차


1. 8월 17일, 서품은 어디에서 이뤄졌나

우리역사넷은 김대건이 1845년 8월 17일 상하이 김가항 성당에서 페레올 주교에게 사제품을 받았다고 기록한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도 같은 날짜와 장소를 제시하며, 그가 한국인 최초의 사제, 즉 신부가 됐다고 설명한다.

따라서 이 사건의 핵심은 분명하다. 날짜는 1845년 8월 17일, 장소는 조선이 아닌 중국 상하이, 서품을 집전한 이는 페레올 주교다. 역사 인물을 소개할 때 널리 알려진 ‘첫 한국인 신부’라는 표현만 되풀이하기보다, 이 세 가지 사실을 함께 적어야 장면이 정확해진다.


2. 김대건은 왜 조선을 떠나 공부했나

김대건은 1836년 프랑스 선교사 모방에게 신학생으로 선발됐다. 이듬해 최방제·최양업과 함께 마카오에 마련된 조선교구 신학교를 향해 떠났고, 그곳에서 교육 과정을 밟았다.

당시 조선 안에서 교육을 이어 가기 어려운 환경과 박해의 위험은 그의 유학 배경이었다. 우리역사넷은 세 신학생이 중국을 가로질러 1837년 6월 마카오에 도착한 뒤, 현지의 조선 신학교에서 교육을 받았다고 설명한다.

이 여정은 개인의 유학 경력에 그치지 않는다. 19세기 조선의 종교·교육·국경 이동이 서로 얽혀 있던 조건을 보여 준다. 다만 이 글은 그 시대의 종교 정책 전체를 단정하지 않고, 김대건의 생애 기록에 확인되는 이동과 교육에 초점을 둔다.


3. 서품 전, 그가 준비한 일은 무엇이었나

김대건은 1845년 1월 의주를 거쳐 서울에 도착한 뒤, 상하이에서 올 페레올 주교를 맞이할 준비를 했다. 우리역사넷은 그가 선교사 거처를 마련하고 배를 구입했으며, 조선전도와 순교사 관련 보고서를 작성했다고 전한다.

그해 4월 그는 동행자들과 제물포를 떠나 상하이로 향했다. 상하이에서 서품을 받게 된 과정은 한 번의 종교 의식만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조선으로 돌아갈 항로와 사람을 맞이할 준비, 지도와 기록을 정리하는 일이 앞서 있었다.

이 대목에서 ‘항로 개척’이 곧바로 성공한 모든 결과를 뜻한다고 볼 수는 없다. 사료가 확인하는 것은 김대건이 선교사 입국과 귀국을 위해 배와 해로를 준비했다는 사실이다.


4. 첫 미사와 귀국은 어떻게 이어졌나

우리역사넷은 김대건이 서품 뒤 횡당 성당에서 첫 미사를 드렸다고 기록한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첫 미사를 8월 24일로 적고 있다. 서품일과 첫 미사일을 같은 날의 사건으로 섞지 않는 것이 좋다.

8월 31일 김대건 일행은 상하이를 떠나 조선으로 향했다. 바다에서 풍랑을 만나 제주에 표착한 뒤, 10월 12일 충청도 강경 부근 황산포에 도착했다는 것이 우리역사넷의 서술이다. 서품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곧 귀국과 사목으로 이어지는 여정이었다.

1845년 중국 상하이의 작은 성당에서 한 한국인 남성이 주교 앞에 무릎 꿇은 사제 서품 장면을 표현한 AI 재연 그림>
▲ 1845년 상하이 김가항 성당에서의 김대건 사제 서품을 표현한 AI 재연 이미지. 실제 서품 장면의 기록사진·사료 이미지가 아니다. (출처: dolnews 제작, AI 재연 이미지)

5. ‘최초’라는 기록을 읽는 방법

김대건의 서품은 한국인 로마 가톨릭 사제의 첫 사례로 기록된다. 이 표현은 그의 국적·사제 신분이라는 범위를 말하는 것이며, 서품 장소가 조선이었다는 뜻은 아니다.

그의 사제 생활은 길지 않았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김대건이 1846년 6월 체포된 뒤 같은 해 9월 16일 새남터에서 처형됐다고 설명한다. 그렇다고 짧은 활동 기간만으로 그 이전의 공부, 이동, 귀국 준비까지 줄여 보아서는 안 된다.

1845년 8월 17일의 기록이 남긴 무게는 한 사람의 ‘최초’에만 있지 않다. 조선 후기의 청년이 국경을 건너 교육을 받고, 바다를 통해 다시 조선으로 돌아오려 했던 구체적인 선택과 노동까지 함께 보게 한다.


마치며

1845년 8월 17일 김대건은 중국 상하이 김가항 성당에서 페레올 주교에게 사제품을 받았다. 한국인 최초의 가톨릭 사제가 된 장소가 조선이 아니라 상하이였다는 사실은, 그의 서품이 긴 이동과 귀국 준비의 한가운데 있었음을 보여 준다.

역사의 ‘최초’는 종종 한 줄로 남지만, 그 한 줄 앞에는 길과 배, 공부와 준비가 있다. 김대건의 8월 17일은 그 시간을 함께 떠올리게 하는 날짜다.


자주 묻는 질문 (FAQ)

Q1. 김대건 신부는 언제 사제 서품을 받았나요?

국사편찬위원회 우리역사넷과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김대건이 1845년 8월 17일 사제품을 받았다고 기록합니다.

Q2. 김대건 신부는 어디에서 서품을 받았나요?

중국 상하이 김가항 성당입니다. 서품 장소가 조선이 아니라 상하이였다는 점을 함께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Q3. 누가 김대건에게 사제품을 줬나요?

우리역사넷은 페레올 주교가 김대건에게 사제품을 줬다고 설명합니다.

Q4. 김대건의 첫 미사는 서품 당일이었나요?

아닙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그가 서품 일주일 뒤인 1845년 8월 24일 횡당 성당에서 첫 미사를 집전했다고 기록합니다.


참고 자료

  • 국사편찬위원회 우리역사넷, 「김대건 신부」
  • 국사편찬위원회 우리역사넷, 「김대건, 한국 최초의 천주교 신부가 되다」
  •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김대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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