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5년 7월 29일, 한국 없는 자리에서 한국을 논하다|가쓰라–태프트 비망록

1905년 7월 29일, 한국 없는 자리에서 한국을 논하다|가쓰라–태프트 비망록

1905년 7월 27일 아침, 일본 수상 가쓰라 다로와 미국 육군장관 윌리엄 하워드 태프트가 도쿄에서 비밀리에 만났습니다. 두 사람은 필리핀과 동아시아의 세력 관계, 그리고 대한제국의 앞날을 논의했습니다.

그 대화는 이틀 뒤인 7월 29일 ‘합의 비망록(agreed memorandum)’으로 정리됐습니다. 오늘날 흔히 가쓰라–태프트 밀약이라고 부르는 문서입니다.

그러나 정확히 말하면 이것은 양국이 비준한 정식 조약이 아니었습니다. 문서에도 한국과 필리핀을 서로 맞바꾼다는 조항은 없습니다. 그렇다고 역사적 의미까지 가벼운 것은 아닙니다. 대한제국이 빠진 자리에서 미국과 일본의 고위 인사가 일본의 한국 지배 구상을 논의했고, 시어도어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도 태프트의 견해에 동의하는 뜻을 밝혔기 때문입니다.

가쓰라–태프트 비망록은 무엇을 담았고, 왜 ‘밀약’이라 불리며, 같은 해 11월의 을사늑약과는 어떤 관계가 있을까요?


목차


1. 7월 27일 회담, 7월 29일 비망록

1905년 여름은 러일전쟁이 끝을 향해 가던 시기였습니다. 일본은 전쟁에서 우세를 잡았지만 막대한 인명과 비용을 치렀고, 미국 대통령 시어도어 루스벨트는 러시아와 일본 사이의 강화 협상을 중재하고 있었습니다.

루스벨트의 개인 특사 자격으로 아시아를 방문한 미국 육군장관 태프트는 필리핀으로 가는 길에 일본에 들렀습니다. 7월 27일 아침, 그는 일본 수상 가쓰라와 긴 비밀 대화를 나눴습니다.

날짜는 구분해서 기억해야 합니다. 회담은 7월 27일에 열렸고, 그 내용을 정리한 비망록은 7월 29일자입니다. 따라서 “7월 29일 두 사람이 조약을 체결했다”는 표현보다 “7월 29일 합의 비망록이 작성됐다”는 설명이 정확합니다.

일본 수상 가쓰라 다로 흑백 초상
▲ 일본 수상 가쓰라 다로의 초상. (출처: 미국 의회도서관·Wikimedia Commons, Public Domain)

2. 필리핀·동아시아·한국을 둘러싼 세 가지 대화

비망록에 기록된 대화는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뉩니다.

첫째는 필리핀 문제였습니다. 태프트는 일본이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뒤 필리핀으로 진출할 수 있다는 미국 내 우려를 언급했습니다. 가쓰라는 일본에 필리핀을 침략할 의도가 없으며, 필리핀이 미국처럼 강하고 우호적인 국가의 통치를 받는 것이 일본에도 이롭다고 답했습니다.

둘째는 동아시아의 세력 관계였습니다. 가쓰라는 일본·미국·영국의 우호적 협력이 극동의 평화를 지키는 길이라고 주장했습니다. 태프트는 미국 대통령이 상원의 동의 없이 공식 동맹에 가입할 수는 없다고 선을 그었습니다.

셋째는 한국 문제였습니다. 가쓰라는 한국이 다시 국제 분쟁의 원인이 되지 않게 일본이 확고한 조치를 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태프트는 일본이 한국의 외교를 통제하는 정도의 종주권을 확립하는 것이 전쟁의 논리적 결과라는 취지로 수긍했습니다. 다만 이것이 자신의 개인적 견해이며, 대통령을 대신해 보증할 권한은 없다고 밝혔습니다.


3. 정식 조약이 아닌데 왜 ‘밀약’이라 부를까

한국에서는 이 문서를 오래전부터 ‘가쓰라–태프트 밀약’ 또는 ‘협약’으로 불러 왔습니다. 회담이 비밀리에 진행됐고 문서도 당시 공개되지 않았으며, 한국의 운명에 관한 중대한 내용이 포함됐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문서의 형식은 조약과 달랐습니다. 가쓰라와 태프트가 양국의 전권대표로서 서명하고 각국이 비준한 조약문이 아니라, 두 사람이 나눈 대화를 정리한 합의 비망록이었습니다. 태프트 자신도 한국 문제에 관해 공식 보증을 할 권한이 없다고 명시했습니다.

이 문서는 1924년 역사학자 타일러 데넷이 미국 의회도서관 자료에서 발견하면서 세상에 알려졌습니다. 데넷은 이를 비밀협정으로 해석했지만, 이후 연구자들은 법적 구속력이 있는 협정이 아니라 회담 기록이라는 반론을 제기했습니다.

따라서 ‘밀약’이라는 통용 명칭을 사용할 수는 있어도, 정식 조약이었다고 단정해서는 안 됩니다.


4. 한국과 필리핀을 맞바꾼 문서였을까

가쓰라–태프트 비망록은 흔히 “미국은 필리핀을, 일본은 한국을 차지하기로 맞바꾼 문서”라고 요약됩니다. 당시 미국과 일본이 각각 필리핀과 한국에 지배권을 행사하려 했다는 점을 압축한 설명이지만, 문서에 실제로 두 지역을 교환한다는 조항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필리핀 부분에서는 일본이 미국의 통치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고 침략 의사가 없다고 밝혔습니다. 한국 부분에서는 태프트가 일본의 한국 지배 구상을 개인 의견으로 수긍했습니다. 두 사안은 같은 대화록 안에 있지만, “필리핀을 보장하는 대가로 한국을 넘긴다”는 식의 교환 조건은 적혀 있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대한제국의 입장에서 본 핵심 문제는 분명합니다. 한국의 주권과 외교권을 두고 논의하면서도 한국 정부나 한국인은 그 자리에 없었습니다. 문서의 형식보다 더 무거운 사실은 열강이 한국을 독립된 협상 주체가 아니라 세력 조정의 대상으로 다뤘다는 점입니다.

미국 육군장관을 지낸 윌리엄 하워드 태프트 흑백 초상
▲ 윌리엄 하워드 태프트의 1908년 초상. (출처: Bain News Service·미국 의회도서관·Wikimedia Commons, Public Domain)

5. 루스벨트의 확인이 보여 준 미국의 태도

태프트는 비망록을 미국 국무장관 엘리후 루트에게 보냈고, 내용은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전달됐습니다. 국사편찬위원회 우리역사넷에 따르면 루스벨트는 태프트의 견해에 동의한다는 뜻을 밝혔습니다.

이 확인이 비망록을 정식 조약으로 바꾸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일본에는 중요한 외교적 신호였습니다. 미국 대통령이 일본의 대한제국 지배 구상에 반대하지 않는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같은 해 11월 일본이 을사늑약을 강제로 체결해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빼앗은 뒤, 미국은 서울 주재 공사관을 폐쇄했습니다. 미 국무부 역사국 기록에 따르면 일본이 11월 17일 한국의 대외관계를 장악했고 미국 공사관은 11월 28일 문을 닫았습니다.


6. 제2차 영일동맹·포츠머스조약·을사늑약

가쓰라–태프트 비망록 하나만으로 을사늑약의 모든 원인을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일본의 대한제국 침탈은 군사력과 강압, 그리고 여러 열강을 상대로 한 외교가 함께 작동한 결과였습니다.

1905년 8월 제2차 영일동맹에서 영국은 일본이 한국에서 정치·군사·경제적 이익을 보호하기 위한 조치를 취할 권리가 있음을 인정했습니다. 9월 포츠머스조약에서는 러시아가 일본의 한국 내 우월한 정치·군사·경제적 이익을 인정하고 일본의 조치에 간섭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11월 17일 일본은 고종과 대신들을 압박해 을사늑약을 강제로 체결하고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했습니다.

가쓰라–태프트 비망록은 이 연쇄 과정의 한 장면입니다. 일본이 한국을 보호국으로 만들기 전에 미국의 태도를 확인한 외교 기록이며, 당시 국제질서가 대한제국의 독립을 지켜 주지 않았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7. 오늘 이 문서를 정확히 읽어야 하는 이유

가쓰라–태프트 비망록을 정식 조약이라고 부르면 문서의 형식을 왜곡하게 됩니다. 반대로 “단순한 대화 기록일 뿐”이라고만 말하면 그 대화가 실제 외교 환경에서 가진 의미를 놓치게 됩니다.

정확한 설명은 두 사실을 함께 보는 데서 시작합니다. 첫째, 법적 구속력을 갖춘 정식 조약은 아니었습니다. 둘째, 미국의 고위 인사와 대통령이 일본의 한국 지배 구상을 사실상 용인하는 태도를 보였다는 점은 분명한 역사적 의미를 지닙니다.

1905년 7월 29일의 비망록이 남긴 가장 날카로운 질문도 여기에 있습니다. 한 나라의 운명이 논의될 때, 정작 그 나라가 협상 자리에 없다면 국제정치는 누구를 위한 질서인가 하는 질문입니다.


마치며

1905년 7월 27일 가쓰라와 태프트는 비밀리에 대화했고, 7월 29일 그 내용이 합의 비망록으로 정리됐습니다. 문서는 정식 조약도, 한국과 필리핀을 맞바꾼다는 교환계약도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그 안에는 일본의 대한제국 지배 구상과 이를 제지하지 않으려는 미국의 태도가 담겨 있었습니다. 가쓰라–태프트 비망록은 대한제국의 주권이 열강의 이해관계 속에서 어떻게 배제됐는지를 보여 주는 기록입니다.


자주 묻는 질문 (FAQ)

Q1. 가쓰라–태프트 밀약은 언제 체결됐나요?

두 사람의 비밀 회담은 1905년 7월 27일 열렸고, 대화 내용을 정리한 합의 비망록은 7월 29일자로 작성됐습니다. 정식 조약을 ‘체결했다’고 표현하기보다 7월 29일 비망록이 작성됐다고 설명하는 편이 정확합니다.

Q2. 가쓰라–태프트 비망록은 정식 조약인가요?

아닙니다. 양국이 정식으로 체결하고 비준한 조약이 아니라 가쓰라와 태프트의 대화를 정리한 합의 비망록입니다. 태프트도 한국 문제에 대해 대통령을 대신해 보증할 권한이 없다고 밝혔습니다.

Q3. 미국과 일본이 한국과 필리핀을 맞바꾼 것인가요?

문서에 두 지역을 서로 교환한다는 조항은 없습니다. 일본은 필리핀에 침략 의도가 없다고 밝혔고, 태프트는 일본의 한국 지배 구상을 개인 의견으로 수긍했습니다. ‘맞교환’은 당시 제국주의적 이해관계를 압축한 표현이지만 문서의 정확한 문구는 아닙니다.

Q4. 이 비망록 때문에 을사늑약이 체결됐나요?

단독 원인이라고 볼 수는 없습니다. 제2차 영일동맹과 포츠머스조약 등 여러 국제적 승인과 묵인, 일본의 군사적 강압이 함께 작용했습니다. 비망록은 일본이 대한제국 보호국화에 대한 미국의 태도를 확인한 과정의 일부였습니다.

Q5. 비망록은 언제 세상에 알려졌나요?

역사학자 타일러 데넷이 1924년 미국 의회도서관에서 관련 문서를 발견해 공개하면서 널리 알려졌습니다. 이후 이것이 비밀협정인지 단순한 회담 기록인지에 관한 학술적 논쟁이 이어졌습니다.


참고 자료

  • 국사편찬위원회 우리역사넷, 「가쓰라-태프트 밀약」
  • GRIPS·도쿄대학교, 「The Taft-Katsura Agreement」 영문 원문
  • Theodore Roosevelt Digital Library, 「Memorandum from William H. Taft to Elihu Root」
  • 미국 국무부 역사국, 「The Treaty of Portsmouth and the Russo-Japanese War」
  • 미국 국무부 역사국, 「A Guide to the United States’ History of Recognition, Diplomatic, and Consular Relations, by Country: Korea」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을사늑약」

📚 함께 보는 오늘의 역사(365일)

매일 하나의 역사적 순간을 기록합니다.

댓글 쓰기

0 Comments

문의하기 양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