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년 8월 6일, 히로시마에 있던 조선인들은 어떻게 되었나

1945년 8월 6일 오전 8시 15분경, 미국이 투하한 원자폭탄이 일본 히로시마 상공에서 폭발했다. 국사편찬위원회 우리역사넷은 8월 6일 히로시마, 8월 9일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이 투하됐다고 기록한다.

그날 히로시마에는 일본인이 아닌 조선인도 있었다. 국가기록원은 징용 등으로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머물던 조선인 약 7만 명이 피폭되고, 이 가운데 약 4만 명이 사망한 것으로 추산된다고 설명한다.

이 숫자는 히로시마 한 도시만의 수치가 아니다. 두 도시에 있던 조선인을 합친, 1945년 12월 말 기준의 추산이다. 그래서 이를 확정된 개인별 명부나 히로시마 단독 사망자 수처럼 쓰면 안 된다.

광복을 아흐레 앞둔 비극이었지만, 8월 6일의 원폭 투하와 8월 15일의 일본 항복 선언은 같은 날의 사건이 아니다. 이 글은 그 시간차와 조선인 피폭자의 존재를 함께 기록한다.


목차


1. 1945년 8월 6일 히로시마에서는 무엇이 일어났나

미국 에너지부의 맨해튼 프로젝트 역사 자료는 1945년 8월 6일 오전, B-29 폭격기 에놀라 게이가 히로시마를 향해 출격했고 현지 시각 오전 8시 15분경 ‘리틀 보이’를 투하했다고 기록한다. 폭탄은 도시 상공에서 폭발했다.

한국사에서 이 사건은 세계사의 한 장면으로만 남지 않는다. 국사편찬위원회는 8월 6일 히로시마와 8월 9일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이 투하됐고, 뒤이어 8월 15일 일본 천황의 항복 선언이 발표됐다고 설명한다.

따라서 8월 6일은 전쟁이 끝난 날이 아니라, 전쟁의 막바지에 대규모 민간인 피해가 발생한 날이다. 그 피해 안에는 식민지 조선에서 일본으로 건너가 있던 사람들이 포함돼 있었다.

원자폭탄 투하 뒤 폐허가 된 1945년 히로시마 시가지
▲ 원자폭탄 투하 뒤 폐허가 된 히로시마 시가지. (출처: 미국 연방정부·Wikimedia Commons, Public Domain)

2. 왜 히로시마에 조선인이 있었나

국가기록원은 태평양전쟁기에 일제가 전쟁 수행에 필요한 인력과 자원을 강제로 동원했다고 설명한다. 1939년 국민징용령 시행 뒤 조선총독부와 경찰이 노동자 모집과 배치를 주도했고, 조선인들은 일본 본토를 포함한 여러 지역의 탄광·공장·건설 현장으로 이송됐다.

국가기록원의 원폭 피해 기록물 안내는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있던 조선인을 ‘징용 등으로’ 머물던 사람들로 표현한다. 그러므로 모든 조선인이 같은 경로로 그곳에 갔다고 단정할 수는 없지만, 식민지 동원 체제가 이 사건의 중요한 배경이었다는 점은 분명하다.

피폭자 명부와 구술 기록이 남아 있다는 사실도 중요하다. 국가기록원은 히로시마·나가사키 조선인 피폭자 실태조사 자료, 피폭자 명부, 원자폭탄 피해 노무동원 구술자료를 소장하고 있다. 숫자 뒤에 각기 다른 삶과 이동의 경로가 있었다는 뜻이다.


3. 약 7만 명과 약 4만 명은 무엇을 뜻하나

국가기록원이 제시한 수치는 조선인 약 7만 명 피폭, 그 가운데 약 4만 명 사망이다. 국가기록원은 이를 1945년 12월 말 기준의 추산이라고 명시한다.

수치의 범위도 함께 읽어야 한다. 이 추산은 8월 6일 히로시마와 8월 9일 나가사키 두 도시의 조선인 피폭자를 합친 것이므로, 히로시마만의 피해 규모로 바꾸어 말할 수 없다.

또한 ‘약’이라는 표현을 빼고 정확한 확정 통계처럼 인용해서도 안 된다. 국가기록원은 피폭자 실태조사와 명부, 구술 기록을 함께 소개한다. 기록이 남아 있다는 사실과 모든 피해를 단일 숫자로 완전히 환산하기 어렵다는 사실은 모순되지 않는다.

1945년 8월 원자폭탄 투하 뒤 파괴된 히로시마 시가지 항공사진
▲ 1945년 8월 원자폭탄 투하 뒤 파괴된 히로시마 시가지의 항공 기록사진. 사진은 도시의 피해를 보여 주며 조선인 피폭자 개인을 식별하는 자료는 아니다. (출처: 미 해군 국립해군항공박물관·Wikimedia Commons, Public Domain)

4. 광복은 피폭 피해의 끝이었나

8월 15일 일본 천황의 항복 선언 뒤 조선은 해방을 맞았다. 그러나 피폭 생존자에게 그날이 곧바로 건강 피해와 생활의 어려움이 끝나는 날은 아니었다.

국가기록원은 생존한 조선인 피폭자들이 각종 질병과 후유증을 겪었고, 피해가 자녀와 손자 세대의 취업·결혼 등 사회생활에도 장기간 영향을 미쳤다고 설명한다. 이는 모든 개인의 경험을 하나로 일반화하는 말이 아니라, 기록원이 정리한 피해 조사와 구술 기록의 범위를 가리킨다.

귀환 역시 한 번의 사건으로 끝나지 않았다. 국가기록원에는 원폭 피해와 관련된 조선인 피폭자 명부뿐 아니라, 광복 이후 일본에서 조선으로 돌아오는 과정에 관한 기록도 남아 있다. 해방과 귀환, 피폭 피해의 회복은 서로 다른 시간표를 가졌다.


5. 8월 6일과 8월 15일은 어떻게 구분해야 하나

8월 6일은 히로시마 원폭 투하일이다. 8월 9일에는 나가사키에도 원자폭탄이 투하됐다. 국사편찬위원회는 일본이 8월 14일 무조건 항복 의사를 전달했고, 8월 15일 천황의 항복 선언이 라디오로 발표됐다고 설명한다.

두 날짜를 한 문장으로 뭉뚱그리면 조선인 피폭자의 피해가 ‘광복 직전의 일’이라는 배경 속에만 묻히기 쉽다. 8월 6일의 피해와 8월 15일의 해방은 이어져 있지만, 같은 사건도 같은 경험도 아니었다.

그래서 이 날을 기억할 때는 원폭의 파괴, 식민지 동원으로 그곳에 있던 조선인, 그리고 해방 이후에도 이어진 피해 기록을 함께 봐야 한다. 한국의 광복 서사에서 빠지기 쉬운 사람들을 다시 읽는 일이기 때문이다.


마치며

1945년 8월 6일 히로시마 원폭 피해에는 조선인도 포함돼 있었다. 국가기록원이 제시한 약 7만 명 피폭·약 4만 명 사망은 히로시마와 나가사키를 합친 1945년 12월 말 기준의 추산이다.

그 수치를 히로시마만의 확정 통계로 바꾸지 않고, 징용 등 식민지 동원의 맥락과 생존자·귀환자의 이후 기록까지 함께 보는 것. 그것이 8월 6일을 한국사 안에서 정확하게 기억하는 출발점이다.


자주 묻는 질문 (FAQ)

Q1. 히로시마 원폭은 언제 투하됐나?

1945년 8월 6일이다. 미국 에너지부 자료는 현지 시각 오전 8시 15분경 원자폭탄이 투하됐다고 기록한다.

Q2. 조선인 피폭자 약 7만 명은 히로시마만의 수치인가?

아니다. 국가기록원의 약 7만 명 피폭·약 4만 명 사망은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있던 조선인을 합친 1945년 12월 말 기준의 추산이다.

Q3. 히로시마에 있던 조선인은 모두 강제동원됐나?

국가기록원은 ‘징용 등으로’ 두 도시에 머물던 조선인이라고 설명한다. 식민지 동원 체제가 중요한 배경이지만, 모든 사람이 같은 경로로 그곳에 있었다고 단정해서는 안 된다.

Q4. 원폭 투하와 광복은 같은 날인가?

아니다. 히로시마 원폭 투하는 8월 6일, 일본 천황의 항복 선언 발표는 8월 15일이다.


참고 자료

  • 국가기록원, 「히로시마와 나가사키 원폭 피해 관련 기록물」
  • 국사편찬위원회 우리역사넷, 「제2차 세계대전의 종전과 한국의 해방」
  • 국사편찬위원회 우리역사넷, 「태평양 전쟁의 종전-일왕 히로히토의 항복 방송문」
  • 미국 에너지부, 『The Manhattan Project: Making the Atomic Bomb』
  • Wikimedia Commons, 「Hiroshima aftermath.jpg」 및 「Hiroshima aerial view after atomic bomb 8-1945.jpe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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